담임목사 부흥칼럼

Title2015.05.31 – 웨일즈 부흥과 한국교회
Authorberlin-visionCount97Date2015/06/01

김현배 목사 부흥칼럼 (66) 2015. 05.31

웨일즈 부흥과 한국교회

 

18세기 초반에 있었던 웨일즈의 사회적, 도덕적, 종교적 상황은 너무나 암울하고 비참하였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부도덕한 상태에 있었으며 거짓과 욕설, 비방, 분쟁, 도박 등이 난무하였고 주일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평신도와 성직자들도 술 취함과 방탕이 만연되어 있었으며 목회자들은 자신의 사명과 사역에 전혀 열정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설교는 아무 감동이나 생명력도 없어 청중들에게 어떠한 영향력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이처럼 웨일즈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고 영적으로 무지한 상태였으며 결국 온 나라가 생명력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735년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웨일즈에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18세기 당시 웨일즈의 탁월한 설교자 다니엘 로울란드와 하웰 하리스의 복음적인 설교를 듣고서 수백 명, 수천 명이 교회로 몰려왔습니다. 19세기에도 토마스 찰스와 크리스마스 에반스, 존 엘리아스, 다비드 모건 등의 능력있는 메시지와 20세기 초에 에반 로버츠의 메시지를 통해 1904-5년 남웨일즈에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위대한 부흥의 역사로 인해 웨일즈의 많은 사람들이 회심했고, 삶의 개혁이 일어났고, 사회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교회는 많은 선교사들을 세계에 파송했습니다. 특별히 웨일즈 부흥의 불길은 한국에 까지 이어지면서 한국교회에도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웨일즈 하노버 교회(Hanover Church)는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 (Robert Jermain Thomas)를 당시 미전도 종족인 조선에 파송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1866년 9월 미국상선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대동강에 들어왔습니다. 이때 조선군인들은 이 배가 침략선이라고 판단하여 솔가지와 땔나무에 불을 붙여 일제히 배 안으로 집어 던졌습니다. 죽음을 직감한 토마스 선교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목이 터져라 외치면서 있는 힘을 다해 육지 쪽으로 성경책을 던졌습니다. 그때 토마스 나의 27세, 마침내 그는 병사의 칼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초석이 된다”는 터툴리안의 증언대로 순교의 피가 많이 흘렀던 평양에 수 많은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둘째는 1904-5년 웨일즈 부흥은 전염병과 같아서 북한의 여러 지역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회개 기도와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였고 성령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회심한 사람들이 계속적으로 교회에 등록하면서 교회는 계속 성장했습니다. 또한 각 도시마다 부흥집회가 열리면서 교회마다 기도와 말씀으로 뜨거웠습니다. 걷잡을 수 없이 불길처럼 번지는 영적 각성운동은 드디어 1907년 평양에서 대부흥으로 폭발하였습니다. 그 후 한국교회는 놀라운 성장을 하게 되었고, 세계선교에 힘쓰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웨일즈 부흥이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력은 매우 컸습니다.

 

하지만 지난 몇 세기 동안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으로 가득했던 부흥의 땅 웨일즈는 슬프게도 영성과 능력을 상실하면서 지금은 선교지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한국교회 역시 부흥이 없는 시대를 걷고 있으며, 평양 대부흥을 경험했던 북한교회도 다 무너져 버렸습니다. 하박국 선지자처럼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합 3:2)”라고 부르짖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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