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 2014.02.23 - 1907년 평양 부흥운동(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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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 berlin-vision | Count | 98 | Date | 2014/05/24 |
김현배 목사 부흥칼럼 (7) 2014년 2월 23일 1907년 평양 부흥운동 (1)
1903년 8월에 원산에서 열렸던 부흥사경회에 감리교 선교사 하디(R.A Hardie)의 자기 회개가 부흥의 불길을 점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중국에 주재중인 남감리교 선교사 화이트양의 인도로 일주일 동안 성경 연구와 기도주간을 가졌습니다. 그때 원산에 자리 잡고 있던 하디 목사는 자기의 선교 사업이 실패했음을 자인하고 자기의 전도방법에 대하여 연구하기로 하였습니다. 실패 원인을 분석한 결과 자신의 전도는 단지 자기가 배우고 익힌 지식적 신앙을 전달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후 그는 성경말씀 마태복음 7장 11절 말씀을 읽다가 은혜를 받아 마음속에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령을 충만함을 받고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선교사들 앞에서 그리고 한국교회 회중 앞에서 솔직히 자백하였습니다. 이때 평양에 있던 선교사들은 원산 집회에 은혜가 충만하게 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1906년에 하디 목사를 초청하여 특별집회를 하였습니다. 그 집회 중에 선교사들은 통회와 자복으로 크게 은혜를 입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길함 선교사는 한국인 제직들을 위한 특별 집회를 열었는데 이때에 있었던 성경공부는 요한일서를 중심으로 한 공부였습니다. 말씀 집회에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이 부흥이 급기야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른바 ‘원산부흥운동’ 이었습니다.
그 다음 평양 대부흥이 일어났습니다. 평양대부흥 운동의 발단은 1907년1월 2일부터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열린 겨울 남자 사경회였습니다. 그 사경회에 약 1,000여명이 참석하였습니다. 그들은 사경회 장소까지 오는 교통비는 물론이고 사경회에 참석하는 동안에 필요한 식사와 숙박비 일체의 비용을 자신들이 부담하였습니다. 집회 중 매일 밤 교회는 사람들로 꽉 찼으며 토요일 저녁까지 매일 밤 집회 가운데 주의 능력이 점점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토요일 저녁집회는 그 때까지 열린 저녁 집회 가운데 최고였습니다. 이때 은혜를 갈망하던 성도들이 간절히 기도함으로 당시의 기도의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습니다. 사람들은 일어나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소리를 내어 울며 마룻바닥에 엎드려 주먹으로 마룻장을 치며 과거에 지은 죄를 통회하였습니다.
평양대부흥은 1907년 1월 14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부흥사경회를 하던 중, 선교사와 교회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눈물을 흘리며 뉘우치는 사건을 말합니다. 이후 고백과 뉘우침, 새로운 삶을 선언하는 운동이 전국의 교회로 확산되면서 기독교인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이를 ‘평양대부흥 운동’ 혹은 ‘성령 대부흥 운동’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베를린 땅에 평양대부흥이 다시 일어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베를린은 분열의 영이 강하고 우상 숭배가 강하고 사탄의 세력이 강합니다. 이단들도 많습니다. 베를린에 부흥이 임하게 되면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베를린은 치유의 땅이 되고, 회복의 땅이 될 것입니다. 마치 야곱이 압복강 나루터에서 축복하시지 않고는 그냥 보낼 수 없다며 밤이 맟도록 하나님의 사자와 겨루어 축복을 받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부흥을 사모하십시오. 특히 베를린 땅에 임하도록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십시오. “하나님, 우리 세대에 하나님께서 절대주권적으로 부어주시는 부흥을 경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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