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 2022.12.11 -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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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 berlin-vision | Count | 41 | Date | 2022/12/11 |
부흥칼럼(450)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2022.12.11 성 프란체스코(Francesco, 1181년 또는 1182-1226)는 이탈리아 아시시의 부유한 의류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매력 있는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매우 낙천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프란체스코가 종교 생활로 개종한 것은 갑작스런 헌신이었다기보다는 전도양양한 청년 시기에 읽었던 성경 말씀이었습니다. 1209년 마태복음 10:7-10을 읽을 때 그 말씀이 사도들처럼 청빈하게 살라는 교훈으로 마음 깊이 와 닿았습니다. 이후로 평생 가난한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면서 1206년, 프란체스코는 아버지의 부를 포기하고 집을 떠났습니다. 젊은 프란체스코는 빈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음식 한 조각, 옷 한 가지라도 그것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나눠주고, 스스로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아무 부끄러움도 없이 가진 자들에게 구걸을 했고, 구걸한 것을 가지지 자들과 나눴습니다. 그의 삶은 당시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교회는 힘과 부를 축적해 왔습니다. 이탈리아 사회에서 부자는 교회의 축복 아래 더 부자가 되었지만, 가난한 자는 굶어 죽도록 내버려졌습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는 탐욕에 물들지 않은 겸손한 삶이라는 새로운 길을 제시했습니다. 그와 함께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일하고자 했던 경건한 신앙인들이 많았고, 직접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사람들은 물질로 후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널리 퍼뜨렸던 프란체스코는 예수님을 모방하며, 주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순종하려고 애썼습니다. 나중에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신학 사상을 강조했던 마틴 루터는 선행을 강조하는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혹독히 비판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부를 포기하고 그를 따르기 원하는 이들을 위해 몇 가지 규율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프란체스코 수도회 회칙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1210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인가를 받아 남자 수도회인 프란치스코회를 설립하였고, 그 다음에 여자 수도회인 클라라회와 제3회를 설립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아시시 근처의 버려진 예배당에서 설교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형제애와 회개를 전파하기 시작하였고 사랑과 봉사를 강조했습니다. 그의 단순한 복음은 많은 추종자들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는 몸소 이탈리아 거의 전역을 전도를 하면서 통과했습니다. 로마 가톨릭교회 수사이자 저명한 설교가로서 큰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1218년경 프란체스코를 따르는 이들은 최소한 3천 명에 달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1223년 공직을 사임한 뒤 1224년 몬테 알베르노의 암자에 들어가 여생을 은거와 기도로 보냈습니다. 1226년 10월,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죽음을 맞이한 프란체스코는 2년 뒤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되었습니다. 그는 프로테스탄트 교도들과 로마가톨릭 교도들 모두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나는 내 의무를 다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들에게 당신들의 의무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기를 원합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가난을 선택한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는 현대의 종교 무대에서 여전히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프란체스코처럼 이 시대에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으로 성장해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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