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부흥칼럼

Title2021.06.06 - 행동하는 양심, 디트리히 본회퍼
Authorberlin-visionCount31Date2021/06/06

부흥칼럼(372)       행동하는 양심, 디트리히 본회퍼”          2021.06.06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는 1906년 2월 4일, 독일 프로이센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나 1923~27년 튀빙겐대학교와 베를린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베를린대학교에서는 아돌프 폰 하르나크, 라인홀드 제베르크, 카를 홀 같은 역사신학자들에게서 영향을 받았고, 칼 바르트가 스위스에서 주창한 새로운 ‘계시신학’에 크게 매료되었습니다. 본회퍼는 독일 루터교회 목사이자, 신학자이며, 반 나치운동가입니다. 고백교회의 설립자 중 한 사람입니다. 에큐메니컬 운동을 지지했으며, 세속 세계에서 그리스도교의 역할에 대한 견해로 중요한 인물입니다.

본회퍼는 독일 교회의 ‘값싼 은혜’를 거부했습니다. 회개 없는 용서, 십자가 없는 속죄, 훈련 없는 세례, 고백 없는 성찬들이 난무하는 것을 개탄했습니다. 그는 진정한 은혜란, 철저한 회개와 십자가의 희생,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그리스도이란 은혜와 함께 세상과 격리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가지고 세상 속에 스며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본회퍼가 말한 ‘세상 속으로’는 무슨 뜻일까? 본회퍼는 미국 뉴욕에서 신학을 공부할 때, 백인교회가 아니라 흑인 사회로 들어가 주일학교를 섬겼습니다. 이때 그는 압제된 자들의 울분과 고뇌를 뼛속 깊이 경험했습니다. 그가 독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나치가 집권하여 유대인들을 탄압하는 사회가 된 상태였습니다.

본회퍼는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은 초창기부터 반유대인주의를 공언한 나치 정권에 대한 저항운동에 가담했습니다. 1933~35년 런던에 있는 조그만 독일인 교회 두 곳에서 목회를 하느라 18개월 동안 독일을 떠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치 정권에 대한 개신교 저항운동의 중심이었던 고백교회의 지도적인 대변자가 되었습니다. 1935년부터 그는 수많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나치의 잘못된 점을 비판하는 서적들을 출간하며 나치 저항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친구들은 본회퍼에게 독일을 떠날 것을 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암담한 현실을 피한다면 전쟁이 끝난 후 사회를 이끌 자격이 없다면 거절했고, 곧 히틀러 암살에 가담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만류하는 주장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당신의 자녀들이 운동장에 있는데, 미친 운전사가 버스를 몰고 그 아이들을 향해 돌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버스에 타고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 운전수를 제지하겠는가, 기도만 하겠는가?” 1938년 변호사인 매형 한스 폰 도나니의 소개로 히틀러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단체를 알게 되면서부터 본회퍼는 점점 더 정치성을 띤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본회퍼는 아돌프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모임에 가담했지만 실패합니다. 그는 1943년 3월 체포되어 바이에른 플로센뷔르크 수용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연합군 도착 23일 전, 1945년 4월 9일 플뢰센베르크에서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그가 처형당한 곳에는 그를 기념하는 묘지와 명판이 있습니다. 연합군이 조금만 더 일찍 진격했더라면 어땠을까? ‘값싼 은혜, 비겁한 양심, 타협과 결탁, 권력 지향, 물질 만능이 팽배한 교회와 성도들이 새롭게 바라보아야 할 인물이 디트리히 본회퍼라 생각합니다. 그는 행동하는 양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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