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 2020.01.19 - 제주선교의 문을 연 이기풍 목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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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 berlin-vision | Count | 63 | Date | 2020/01/26 |
부흥칼럼(301) “제주선교의 문을 연 이기풍 목사” 2020.01.19 이기풍 목사는 1865년 12월 23일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여섯 살에 이미 사서오경을 줄줄 외웠고 열두 살에는 백일장에 나가서 장원을 차지할 정도로 학문에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하지만 그의 성품은 어려서 부터 거칠었습니다. 어느 날 이기풍은 거만한 평양 죄수사가 지나가자 그의 멱살을 잡고 땅바닥에 내동이 쳤습니다. 또 그는 “예수 믿으세요. 죄를 회개하고 예수 믿으세요.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 간다”고 복음을 외치고 있는 사무엘 모펫(마포삼열)선교사를 향해 돌멩이 하나를 던졌습니다. 턱에 맞은 선교사는 그 자리에 거꾸러졌고, 낭자하게 흐르던 피가 땅으로 배어들었습니다. 그는 핍박과 역경에도 학습과 세례를 베풀었으며, 교회 건축도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이기풍은 깡패들을 모두 데리고 교회 건축 현장으로 쳐들어가 닥치는 대로 짓밟고 부숴버렸습니다.
얼마 후 또 다른 서양사람 스왈른 선교사가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십시오!” 크게 소리쳤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또 돌을 집어 던졌을 텐데 이기풍은 그 자리에서 스왈른 선교사 앞에 무릎을 꿇고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돌을 집어 던져 턱을 부수고, 교회 건축 현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고통을 주었던 모펫 선교사를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모펫은 이기풍과 함께 부등켜 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후 이기풍은 동이 트기만 하면 평양 시내를 누비며 전도했습니다. 그의 삶은 평양 제1의 깡패에서 평양 제1의 전도자로 180도 변신했습니다.
이기풍은 1903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이 되었고, 1907년 장대현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 7명 중에 독노회에서는 이기풍을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제주도가 어려운 지역인지는 알지만 그는 복음에 ‘빚진 자’로서 은혜를 갚기 위해 제주 선교를 결정했습니다. 숭의여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당시 최고 엘리트였던 그녀는 모펫 선교사의 중매로 이기풍과 결혼을 하고 늘 남편을 위해 기도하는 든든한 후원자였습니다. 이기풍은 작은 배를 타고 인천항을 떠나 군산과 목포를 거쳐 거센 풍랑을 이겨내면서 간신히 제주도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황무지와 같은 제주도 선교 사역이 너무 힘들었지만 조랑말을 타고 돌아다니면서 전도했습니다. 이기풍이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대하니, 그동안 굳게 닫혀 있던 제주도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가난과 배고픔, 질병, 온갖 핍박과 반대 속에서 이기풍은 제주 성안교회를 비롯하여 금성, 삼양, 조춘, 모슬포, 한림, 용수, 협제, 내도, 세화 등 30여 개의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는 목숨 바쳐 제주도의 복음화를 위해 열정을 쏟았습니다. 1942년 6월 20일 77세의 일기로 여수 우학리 교회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술과 주먹으로 살았던 폭행자요 평양의 사울이었던 이기풍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생애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의 삶을 다 걸어도 아깝지 않은 복음을 경험함으로 그의 삶과 가치관이 통째로 바뀌었습니다. 그 복음은 그를 통하여제주 복음화를 이루게 했습니다.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우리 인생을 바꿉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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