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부흥칼럼

Title2019.12.01 - 영국의 양심 윌리엄 윌버포스
Authorberlin-visionCount66Date2019/12/01

■부흥칼럼(293)      영국의 양심 윌리엄 윌버포스”          2019.12.01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1759-1828)는 1759년 영국 요크셔 힐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776년 캠브리지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 입학했습니다. 대학에서는 학업보다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사회 부조리에 대해 고민하며 술과 방탕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절친한 친구인 윌리엄 피트가 영국 최연소 수상이 되는 동안 그는 1785년 정계에 입문했고, 그 해 11월에 회심했습니다. 회심 후 정치적 현실에 환멸을 느껴 목회자가 될 것을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존 뉴턴 목사가 정치도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설득해서 정치인으로서 사명을 감당하려고 했습니다. 18세기 말, 세계최고의 해군력과 상선들을 갖고 있던 영국은 아프리카 흑인들을 잡아 북미 대륙으로 실어 나르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기독교 국가를 자처하는 영국이 황금에 눈이 멀어 노예 제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1789년 국회 의사당에서 노예무역 폐지를 위한 연설을 했습니다. “제가 의원 여러분들 앞에 꺼낸 사안은 우리나라와 유럽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세계와 우리 후손들과 직결된 거대한 사안입니다. 노예무역의 문제를 떠나 모든 인간은 평등과 ‘하나님의 향상’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이 대영제국 아래에서 자행되는 끔찍한 노예무역에 대하 어떤 모양으로든 제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큰 책임을 통감합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성경을 실천하는 국가의 국민으로서 속히 폐지해야 합니다. 노예무역 제도는 엄청나게 끔찍하고 비참한 것입니다. 그 잔악함은 평생 씻기지 않은 상처로 깊이 남는 것이므로, 제 양심은 이 노예무역을 완전히 폐지해야 한다고 의원 여러분들에게 고백하는 바입니다.”

반대세력은 너무나 강했습니다. 그는 반대파로부터 늘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노예무역이 국가 정책에 차지하는 비중이 1/3이 넘었기 때문입니다. 즉 노예제도를 기반으로 한 부자들에게 윌버포스는 눈엣 가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1788년 반노예운동의 깃발을 올리기 시작한 이래, 150차례 대국회 논쟁을 벌이면서 고통스럽고 긴 싸움을 견뎌 냈습니다. 1807년 노예무역폐지법을 성립시켰고, 1833년 7월 26일 윌버포스가 하나님 앞에서 뜻을 세운지 56년 만에 영국 의회는 공식적으로 노예제도를 영원히 폐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1787년 10월 28일, 27세의 젊은 영국 국회 의원 윌리엄 윌버포스는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내 앞에 두 가지 큰 목표를 두셨습니다. 하나는 노예무역을 폐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의 악습을 개혁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영국 사회를 개혁하려는 이러한 윌리엄 윌버포스의 헌신적인 노력에 감동하여 그를 ‘영국의 양심’이라 불렀습니다. 그의 영향으로 영국의 젊은 국회의원의 3분의 1이 복음주의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윌버포스는 그의 동역자 ‘클래펌 공동체’와 함께 수많은 모순된 사회 제도를 개혁한 후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잠들었습니다. “어떤 영국인도 윌버포스만큼 영국인들의 양심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그는 영국인들의 삶을 고양시키고, 존귀하게 만든 인물입니다. 그는 세상을 바꾼 위대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는 영국 부흥의 주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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