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 2019.05.12 - 종교개혁자 울리히 츠빙글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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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 berlin-vision | Count | 59 | Date | 2019/05/14 |
■부흥칼럼(264) “종교개혁자 울리히 츠빙글리” 2019.05.12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는 취리히의 종교개혁자입니다. 그는 1484년 1월 1일 토겐부르크(Toggenburg)의 빌드하우스(Wildhaus)에서 농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루터가 출생한 지 7주 후였으며, 칼빈 보다 앞서서 스위스의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인물입니다. 그는 개혁파 교회의 첫 인물로서 개혁주의 신학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1506년 그의 나이 22세 때에 사제로 부름을 받은 츠빙글리는 스위스 글라루스(Glarus) 교구에서 10년 동안 사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1513년부터 1515년 어간에 두 차례 용병의 군종 신부로 참가했던 츠빙글리는 용병 제도에 대해 반대하는 설교를 시작합니다. 또한 그는 에라스무스의 “희랍어 신약성경”을 읽으면서 신약에 눈을 뜨게 되었고, 당시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앙이 신약에서 말하는 것과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츠빙글리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면죄부 판매와 공로사상, 선행에 의한 구원교리의 부당성을 보고 비판하기 시작했습니다. 츠빙글리는 취리히 그로스뭔스터 교회의 청빙을 받고 1519년 1월 1일부터 목회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나이 35세에 교회에 부임한 츠빙글리는 당시 정해진 본문에 따라 설교하는관례를 깨고 마태복음, 복음서, 사도행전, 바울서신 순으로 강해설교를 시작했습니다. 또한 그는 예배에서 라틴어 대신에 일반 시민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독일어로 미사를 인도하였으며, 성상숭배와 성자들에게 기도하는 것, 고해성사, 화체설, 교황의 수위성, 유물 숭배 사상을 비판했습니다. 이러한 츠빙글리의 말씀 사역은 스위스 종교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으며, 취리히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도박과 술 취함이 근절되고, 퇴폐적인 무도나 매춘도 사라졌고, 과도한 사치가 금지되고, 구제 기금이 조성되었습니다. 취리히에 영적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또한 그는 대학교육을 마치거나 대학에서 공부중인 젊은 청년들을 모아서 “예언 모임”이라는 소그룹 성경공부 모임을 인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동료 개혁가들과 함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지도자들과 공개토론회를 개최하여 참된 종교와 거짓된 종교가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했습니다. 츠빙글리는 교회 개혁을 위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한 “67개 조항”을 제시했고, 이 문서에서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판매, 사제제도, 연옥교리, 미사제도, 교황제, 연옥설, 금식제도, 성직자들의 독신제도, 의무적인 금식 등을 비판했습니다. 츠빙글리는 1531년 취리히 시민들을 독려하기 위해 군목이 되어 직접 전쟁에 참가하여 카펠 전투에서 전사하였습니다. 비록 짧은 그의 죽음으로 스위스 종교개혁은 잠시 중단되는 듯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뿌려놓은 씨앗들은 죽지 않고 불링거와 칼빈과 같은 훌륭한 다음 세대 개혁자들로 인하여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말씀 사역으로 종교개혁의 길을 걸었던 츠빙글리는 개혁교회 아버지입니다. 금년은 스위스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입니다. 그는 말씀과 성령으로 취리히의 영혼을 일깨운 종교개혁 부흥의 주역입니다. 우리는 지금 제2의 츠빙글리가 꼭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제2의 츠빙글리, 제3의 츠빙글리가 꼭 필요한 시대에 배출되기를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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