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부흥칼럼

Title2019.04.07 - 1919 유관순 영화 관람 후
Authorberlin-visionCount77Date2019/04/14

■부흥칼럼(259)      ”’1919 유관순’ 영화를 관람 후”         2019.04.07

저는 한국 방문 중에 영화 한 편을 보았습니다. ‘1919 유관순-그녀들의 조국“입니다. 1세기 전, 소녀들이 남긴 그날의 생생한 기록은 제게 큰 감동이었습니다. 100년 전 하나님 사랑, 조국사랑으로 타올랐던 유관순 열사와 8호 감방의 삶은 감동이었습니다. 자유의 소중함! 어머니 보다 더 소중한 나의 조국! 유관순 열사의 동역자이었던 서대문형무소 8호실의 용감한 믿음의 여인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문을 받았던 유관순 열사! 결국 18세 나이에 옥에서 생을 마감했던 유관순 열사! 저도 모르게 눈가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1902년 천안에서 류중권의 3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던 유관순은 1916년 미국인 여성 선교사 사애리시 부인의 권유로 서울의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편입학했습니다. 당시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에 살며 공부하였습니다. 1919년, 3.1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학생들은 학당의 담을 뛰어넘어 참가했습니다. 1919년 3월 1일 서대문형무소 여옥사에 유관순 열사 외 6명의 독립 운동가들이 갇히게 됩니다. 그 유명한 8호 감방은 두 개의 큰 방 중 하나로 ‘유관순 열사의 방’으로 통합니다. 대부분 기독교 신자였던 수감자들은 엄청난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함께 기도하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빼앗긴 조국의 독립을 외치다 끌려온 열사들은 서슬 퍼런 일제의 감옥에서 어떤 무기 하나 없이 온몸으로 맞섰습니다.

수많은 공포의 밤을 서로 달래고 용기를 얻기 위해 결기에 찬 노래를 불렀습니다. 다만 그 여파로 유관순의 부모가 살해당하고, 그 자신도 체포되어 공주 지방법원에서 5년을 구형받습니다. 재판을 받았던 당시 “다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대일본제국 신민으로서 살아가게 될 것을 맹세할 것인가?”하는 재판장의 질문에 유관순은 “나는 왜놈 따위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언젠가 네놈들은 천벌을 받게 되어서 반드시 망하게 되리라!”라며 재판장에게 의자를 던졌습니다. 재판장을 위협을 했다는 이유로 법정모독죄가 추가되어 징역 7년형으로 증형되어 수감되었습니다. 하지만 유관순은 동료들과 함께 옥중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불렀습니다. 옥중 고문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잔인했습니다. 이후 1920년 9월 28일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사합니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참을 수 있사오나 내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를 위해 바칠 목숨이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나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관순 열사가 남긴 유언을 다음 세대에게 제대로 전하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는 윤학렬 감독은 “100년 전 유관순 열사와 그녀들의 기도가 헛되지 않기를 바란다. 967만여명의 기독교인들이 이 영화를 관람해 나라와 민족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극심한 고문 중에도 만세를 외치며 제국주의의 폭력에 저항하던 유관순 열사의 믿음의 삶은 디아스포라로 살아가고 있는 저와 성도들에게 많은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하나님 사랑, 조국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믿는 성도들이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용기 있게 살아갈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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