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부흥칼럼

Title2019.01.13 - 칼 귀츨라프 선교사
Authorberlin-visionCount341Date2019/01/13

■부흥칼럼(248)          칼 귀츨라프 선교사”                2019.01.13

칼 귀츨라프는 1803년 7월 8일 프러시아 포메라니아(Pomerania)의 피리츠(Prytz)라는 작은 마을의 마구상의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국적은 독일이지만 폴란드계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려 했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14살에 스테틴 시에 있는 허리띠 제조공장의 공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개혁파 목사의 아들 하이덴라이히(Heidenreich)를 만나 목사가 되려는 희망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과학을 공부하여 해외 선교사로 가고 싶다는 희망을 가슴에 품은 귀츨라프는 1821년 베를린에 있는 야니케 선교학교의 왕립 장학생으로 입학했습니다. 이 루터교 학교에서 넘치는 학구열과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6개 국어를 습득했다고 합니다.

독일 경건주의 배경 아래 칼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 1803~1851)는 해외선교사역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습니다. 귀츨라프는 1826년 루터교 목사로 안수를 받았으며, 그후 정식 선교사로 파송 받아 개신교를 전해야 한다는 확신으로 선교여행을 떠났습니다. 귀츨라프는 1866년에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보다 34년, 1884년에 인천항을 통해 입국한 의료선교사 알렌보다 52년, 1885년 입국한 미국 선교사인 언더우드, 아펜젤러 보다 53년이나 앞서 1832년 조선을 선교하기 위해 방문한 인물입니다. 1832년 7월 26일, 충청남도 보령에 있는 작은 섬 고대도 앞바다에 도착한 귀츨라프는 우리나라에 최초로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입니다.

귀츨라프 선교사는 고대도에 20일을 머물면서 먹을거리가 제대로 없어 곤궁한 조선인들을 위해 서양감자를 심어주고, 감자와 포도주 재배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또한 그는 약품을 나눠주었고 줄곧 환자들을 위해 약을 처방했습니다. 한 예로 60명의 노인 감기환자를 위한 충분한 약도 처방했는데 이 기록은 조선에서 서양 선교사가 최초의 서양 의술을 베푼 기록입니다. 또한 야생 포도로 음료를 만드는 법을 전수했으며, 주민들에게 한문 성경과 전도문서와 서적을 나눠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경에 나오는 ‘주기도문’을 한문으로 써주고 그것을 한글로 번역한 것입니다. 귀츨라프는 가는 곳마다 조선인들이 읽을 수 있는 한문으로 된 성경이나 한문전도 서적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는 이 외딴 조선 나라에 좋은 복음의 씨를 뿌렸고, 머지않아 영광스럽게 싹이 돋아날 것이고, 열매가 맺힐 것을 기대했습니다.

귀츨라프는 자립선교, 제자도를 통한 현지의 지도자를 양성, 서구의 선교자원을 대거 투자해서 사람 키우는 일에 몰입했던 선교사입니다. 그는 한국에 짧은 기간밖에 머무르지 못했고 또 당시에는 눈에 보이는 열매를 맺지 못했을지라도 최초의 한국 선교사답게 한국 선교의 길을 닦아놓았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귀츨라프는 1851년 8월 9일 48세의 일기로 홍콩에서 숨졌고, 홍콩공원묘지의 개신교 구역에 안장됐습니다. 귀츨라프가 고대도 땅을 밟은 지 186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귀츨라프의 불꽃같은 선교 생애는 오늘날에도 많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Previous2019.01.06 – 조나단 에드워즈의 결심문
Next2019.01.20 – 꿈과 비전이 있는 비전공동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