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tle | 2017.12.03 - 조선 선교의 첫 주자 귀츨라프 선교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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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 berlin-vision | Count | 105 | Date | 2017/12/03 |
■부흥칼럼(193) ”조선 선교의 첫 주자 귀츨라프 선교사” 2017.12.03 약 180여 년 전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은 미전도 종족 국가였습니다. 복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영국의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1761-1834) 선교사는 1793년에 인도에 복음을 전했으며, 영국의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1782-1834) 선교사는 1807년 중국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한 1858년에는 미일수호조약 체결로 일본 문호가 개방되어 일본 선교가 시작 되었으며, 1832년에는 독일의 귀츨라프(Gutzlaff, Karl Friedrick, 1803-1851)가 조선 땅을 밟았습니다. 귀츨라프 선교사는 1803년 7월 8일, 독일 프로이센의 포메라니아(오늘날의 폴란드) 프릿츠에서 재봉사의 독자로 태어났습니다. 할레대학을 졸업한 후 귀츨라프는 루터교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바젤선교회에서 발행되는 선교잡지를 접하면서부터 선교사의 꿈을 가졌으며, 그러나 더 큰 영향력은 런던에서 로버트 모리슨 선교사를 만나면서부터입니다. 그는 중국 선교의 첫 주자입니다. 귀츨라프 선교사가 중국에 입국할 당시 아편 전쟁 등으로 인한 중국 정치 상황이 좋지 않아서 인도네시아와 태국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1831년 2월 16일, 그의 아내 뉴엘은 쌍둥이 딸을 출산하다가 하나가 잘못되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둘째 역시 잃고, 게다가 아내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 귀츨라프는 태국을 떠나 중국을 향해 선교지를 옮겨 새롭게 사역을 시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활발한 문서 사역을 통해 중국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귀츨라프는 배를 타고 중국 해안을 돌며 2차 전도 여행을 하고 있었을 때 심한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 풍랑으로 인해 충남 보령에 있는 작은 섬 고대도에 정박하였습니다. 1832년 7월 26일, 귀츨라프는 개신교 선교사로서는 최초로 한국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기상이변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조선 땅 서해안에 도착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신기하고 놀랍기만 합니다. 조선에 도착한 지 닷새 만에 귀츨라프는 땅을 일구고 무언가를 심기 시작합니다. 100여개가 넘는 감자를 심고 있는 귀츨라프 주위에 수 백 명의 주민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는 감자를 다 심고 난 뒤에 재배법을 정리한 종이를 땅 주인에게 주었습니다. 당시 먹을 것이 귀했던 조선 사람들에게 이것은 정말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또한 귀츨라프는 한문으로 주기도문을 썼고, ‘양이’라는 조선 사람이 한국말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귀츨라프는 한양에서 내려온 특사들로 인해 결국 미지의 나라 조선을 떠나게 됩니다. 조선 사람들이 복음의 문을 굳게 닫아 버립니다. 약 한 달 정도, 귀츨라프의 복음 사역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섬에 들어와 주민들에게 한자로 된 성경을 나누어 주고 복음을 전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맙니다. 비록 눈에 띄는 성과는 없었지만 귀츨라프는 누군가가 분명 반응 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는 조선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쇄국정책을 거두어 조선 땅에 복음의 씨가 떨어지도록 허락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처럼 귀츨라프 선교사의 조선 사랑과 뿌린 복음의 씨앗으로 인해 한국은 복음화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후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비전 가족들은 귀츨라프 선교사처럼 열방을 향한 선교의 열정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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