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부흥칼럼

Title2016.09.04 - 루터 종교개혁 기념비
Authorberlin-visionCount205Date2016/09/04

■부흥칼럼(128)        루터 종교개혁 기념비”              2016.09.04

 

마르틴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성교회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못 박으면서 종교개혁의 불을 지폈습니다. 그 이후 1518년 하이델베르크 광장과 1519년 라이프치히에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교황청은 그 입장을 철회하도록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여러 조항들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담대하게 잘 변호했습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지 4년이 지났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교황청은 루터를 소환하여 제국의회에 출두하도록 했습니다. 정죄와 파문의 절차를 위해 재판을 받게되는 루터는 100년전 체코의 얀 후스처럼 어쩌면 화형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주위 동료들은 루터에게 출두하지 말고 피신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하나님만 의지하기로 결단하고 자신이 작사, 작곡한 곡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송을 부르면서 독일 제국의회에 당당하게 출두하게 됩니다. 드디어 1521년 4월 17일 수요일 오후 4시 제국회의가 보름스에서 열렸습니다. 루터는 독일 칼 5세 황제와 선제후들, 교황의 특사들, 대주교, 백잘, 영주들, 외국 법정의 대사, 각 게층의 고관들..즉 교회와 국가의 최고권력을 대표하는 사람들 앞에 섰습니다. 루터는 황제를 대신해 질문하는 대주교의 법률고문인 요한 폰 에크의 질문에 대답했습니다. “약 25권의 책을 가득 쌓아둔 그 책들의 저자는 자신임을 인정했습니다. 더 나아가 저는 복음의 진리를 전달하는 이 책들은 철회할 수 없습니다. 교황이나 공의회는 여러 번의 오류를 범하였습니다. 저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정복당해 있어서 저는 어떤 것도 철회할 수 없습니다. 제가 여기 서 있습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소서.”

 

1521년 루터의 재판이 열렸던 건물의 터, 바로 그 현장에 기념 표지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루터가 소환되어 출두한 지점의 땅 바닥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HIER STAND, VOR KAISER UND REICH, MARTIN LUTHER 1521″ (1521년 마르틴 루터가 여기 황제와 제국 앞에 서 있다). 또한 이처럼 죽기로 결단하고 오직 믿음으로 목숨을 걸고 변호했던 루터를 기념하기 위하여 보름스에 루터종교개혁 기념비 동상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루터 기념상은 종교개혁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독일에서는 제일 큰 형입니다. 기념비 아래 쪽에는 당시 종교개혁을 따른 27개 도시를 기념하여 27개의 둥근 문장에 이름에 새겨 박아 넣었습니다.

 

1865년 6월 25일에 건립된 종교개혁 기념비에는 마르틴 루터(독일 종교개혁가), 프리드리히1세(독일 작센 선제후), 필립 백작(헤센주의 영주), 얀 후스 (체코 개혁가, 화형),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이탈리아 종교개혁가, 피렌체에서 화형), 존 위클리프 (영국 종교개혁가), 페트뤼스 발데스(프랑스 개혁가), 필립 멜란히톤(독일 종교개혁신학자), 요한네스 로이힐린(독일의 인문학자), 평화의 종려를 든 여인(아욱스부르크를 대표), 슈파이어를 상징하는 여인(슈파이어 대표), 슬퍼하는 여인(막데부르크 대표) 등 총 12명의 얼굴 모습이 세워져 있습니다. 루터와 함께 서 있는 많은 종교개혁자들의 용기와 신앙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많은 도전과 깨우침을 주고 있습니다. 이 영성이 비전공동체에 되살아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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