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선교사 보니파키우스
716년, 독일 선교사 보니파키우스(Bonifatius, 약 675년–754년)는 천둥의 신에게 바쳐진 나무를 도끼로 찍어 넘어뜨린 사람입니다. 보니파키우스, 본명 윈프리드(Winfried)는 잉글랜드 웨식스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베네딕투스 수도원에서 훈련받고 30세에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그는 학문적 재능과 지도력을 갖춘 인물이었기에, 잉글랜드에 머물며 수도원장으로 안정된 삶을 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저지대와 독일의 색슨족을 향한 열정으로 불타올랐습니다.
716년, 그는 프리지아를 향해 첫 선교 여행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프리지아의 왕 라드보드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별다른 성과 없이 잉글랜드로 되돌아왔습니다. 첫 번째 선교여행은 실패였습니다. 동료 수도사들은 그에게 안정된 수도원장 자리를 제안했지만, 보니파키우스는 이를 사양하고 718년 로마로 가서 교황으로부터 정식 선교 명령을 받습니다. 라인강 너머 게르만 민족 사이에 교회를 세우는 일, 그것이 그의 소명이었습니다. 당시 독일에는 이미 여러 형태의 기독교가 전파되어 있던 상태였지만, 아리우스주의와 미신적 신앙이 뒤섞여 있었고 강력한 조직을 갖춘 교회는 없었습니다. 교황은 독일에 교회를 설립하기를 원했습니다.
헤센 지방에서 보니파키우스는 주민들이 천둥의 신 도나르에게 바쳐진 것으로 신성시하던 거대한 참나무(우레목) 앞에 섰습니다. 그는 담대히 나무를 도끼로 내려쳤고, 나무는 땅에 쓰러졌습니다. 그들이 섬기던 신은 나무를 자르는 것조차 막지 못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많은 이교도들이 개종했다고 전해집니다. 카를 마르텔(훗날 투르 전투에서 이슬람 세력을 저지한 프랑크의 지도자)의 후원 아래, 보니파키우스는 독일 전역에 강한 조직력을 갖춘 교회를 세워나갔습니다. 723년 로마에서 주교로 임명되었고, 훗날 마인츠의 대주교가 되었습니다. 70세가 넘은 나이에 대주교직을 사임합니다.
그 후, 그는 처음 선교를 시작했던 프리지아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안정된 자리를 뒤로하고, 다시 한번 낯선 땅으로 향한 것입니다. 754년 오순절 주일, 그는 다쿰 근처 보르네 강가에서 새 신자들에게 견진성사를 베풀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교도 무리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그의 일행이 그 이교도들과 맞서 싸우려 하자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싸우지 마시오. 육체만 죽일 수 있을 뿐 영혼을 죽일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 마시오.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다스리기 위해 이 순간의 죽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입시다."
그는 손에 복음서를 든 채 순교했습니다. 역사가 케네스 래토렛은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보니파키우스만큼 "기독교 신앙의 이상을 삶으로 정확히 보여 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잉글랜드에 머물러 안락하게 살 수 있었지만 낯선 땅을 택했습니다. 또 첫 선교 사역의 실패 후에도 물러서지 않고 더 깊이 헌신했습니다. 은퇴할 나이에도 다시 선교지로 나아갔고, 죽음 앞에서도 복음서를 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독교적인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탁월한 본보기였습니다. 그의 생애는 헌신, 겸손, 용기, 겸손, 희생, 열정, 감동이었습니다.